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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reading 100 books

독재자 - 듀나 외 8인

독재자


 


듀나 외 8인

 (2011.9)



비교적 젊은 쟝르 작가들이 '독재/독재자'라는 주제에 따라 쓴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앤솔러지다.

파수 - 김창규

파멸로 향하는 미래의 어느 시점 또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글이다. 여기서 파수꾼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아닌 내부로부터의 이탈을 경계한다. 파수가 지키는 경계의 밖은 무너져내리는 무저갱 같은 세계이고 그 원인은 에너지 균형의 붕괴다. 섬처럼 남은 세계의 사람들은 파멸을 막을 길이 없다. 그저 파멸을 늦추기 위한 삶을 살 뿐이다. 그들의 대 원칙은 철저한 에너지 보존. 필요한 만큼만 에너지를 사용하고 그만큼의 에너지를 만든다. 에너지를 허투로 쓰거나 아무런 생산도 하지 않는,못하는 자는 이 세계에서 불필요를 넘어 파멸의 순간을 앞당기는 암적 존재이다. 파수꾼인 화자와 새로 파수 일을 시작하게 된 연경을 중심으로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여기서 독재자는 생존자가 구성한 시스템이다. 생존이란 명제 앞에 아무런 해결책도 주어지지 않는 시점에서 사람들의 유일한 해결책 또는 안식처는 집단의식에 의한 독재였다. 다수의 생존을 위해 무능한 소수를 파수의 경계 너머로 떠밀어내는 행동마저 정당화 시키는 순간. 그리고 거기에 최소한의 저항조차 포기해야 하는 개인의 모습이 안타깝다.


개화 - 정소연


최진실 사건 등등이 터질때면 익명성 운운하며 윗분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춰 떠들어대는 인터넷 실명제를 주제로 잡은 단편이다. 빅브라더에 의해 모든 정보들이 통제되는 상황에서 자유를 위한 작은 씨앗을 뿌리려는 (말그대로 씨앗이다) 개인의 이야기를 후일담 형식으로 가족의 입을 빌어 서술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미친놈들은 소수다. 그 미친놈이 일개 개인인지 권력의 핵심인지가 문제일 뿐.


신문이 말하기를 - 김보영


글 절반 이상이 가상의 신문 기사를 발췌한 특이한 형식이다. 인간의 오감마저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의 상용화가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미래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또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명사 몇개만 가리면 얼마전 신문 기사를 읽는 기분이다. 우리나라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구축이 얼마나 쉬운지 실증하는 작품이다. 당장 신문기사 몇개 다운해서 이리저리 편집만 하면 되는 거다.


평형추 - 듀나


쟝르 팬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개념들을 아무런 설명없이 툭툭 던지는 탓에 SF에 무지한 사람은 뭔소리야 싶을 수도 있는 이야기다. LK 그룹과 한회장을 중심으로 둔 듯한 독재자의 이미지와 음모론이 그럴듯하게 펼쳐진다. 최강우에게 불법 이식된 웜 속의 데이터들은 우연히 흘러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죽은 자의 커다란 기억일까. 궁금하게 만들며 서스펜스를 만들어가다 막판에 작은 반전을 보여준다. 독재자란 게 어쩌면 개인의 단순한 욕망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가 주인공들 말이다.


낙하산 - 곽재식


작가 특유의 위트있는 대사들로 가득한 1인칭 시점의 글이다. 얼마 전부터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꿈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회사의 구조개선 사업의 책임자인 OHP(oily haired person)의 전형적이고 독단적인 (동시에 멍청하기 짝이 없는) 혁신사업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이야기는 흘러간다. 갈등구조가 분명하지만 해소되지는 않는다. 악몽의 원인은 규명되지만 여전히 현실은 흘러간다. 악몽과 그 원인에 관한 작은 농담같은 아이디어를 독재자란 주제에 걸맞는 (어쩌면 작가 본인이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법한) 연구소 이야기와 결합했는데 좀 헐거운 느낌이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이야기. 개인마다 특이한 능력을 부여한 만큼 다양한 에피소드를 끌어낼 수 있었겠지만 단편이란 분량의 한계 때문인지 몇몇에 집중한다. 주인공은 다른 이의 살인충동을 부추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살인마 제조기. 이런 능력자들을 따로 가두어두는 수용소로 끌려온 주인공은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다. 다른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심는 사람, 전염병을 옮기는 사람, 다른 이를 중독에 빠트리는 사람 등. 이야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어느 한가지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일목인이란 존재도 등장한다. 설정은 흥미롭지만 이야기는 조금 식상하다. 이런 설정에서 흔하게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서 아쉽다. 체념적인 주인공의 결말을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시도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여기서의 독재자는 편의에 의해 이들을 감금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 - 정보라


옛 문헌을 해석하는 형식이다. 그만큼 고어체와 의뭉스런 표현들 그리고 (해석 불기) (원전 소실) 같은 장치들이 중간중간 등장한다. 오랜 옛날 인간의, 세상의 시간을 지배할 수 있었던 독재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독특한 형식 때문인지 오히려 흥미는 떨어진다. 해석의 단서도 빈약한 옛 문헌들을 직역했을 때의 어색함이랄까 서사는 희미하고 의미는 불명확하다. 현실의 고문헌은 당시의 시대상이나 여타 다른 참조문헌등을 통해 '해석'해 나감으로서 의미가 확장되고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겠지만 순수하게 창작된 이 글에선 그런 부분이 없다. 단편 분량의 설정집 인트로를 보는 느낌이랄까.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 - 임태운


전형적인 한국형 판타지. 한국형 무협지의 영향도 짙게 느껴진다. 이리저릴 끼워맞춘 설정들은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만 그닥 흥미롭진 않다. 결말에선 전형성을 벗어나려는 반전이 시도되었지만 역시나 쉽게 수긍하기 힘들다.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 지를 수 없다 - 박성환


인용도 많고, 실험적 형식이나 설정들이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짚어내기 힘들다. 가상세계에 안주하는 자아에 관한 고찰이라면 이미 질리도록 보아 온 것이다. 가상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기계적 또는 정보적 생명체 역시나 익숙하다. 익숙한 장치를 가져다 익숙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형식만 낯설게 했다. 덕분에 지루해진다.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기엔 2%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