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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ncy's critic

[영화] 맨 온 렛지


맨 온 렛지 - Man on a ledge


애스게르 레스


전 이런 기획을 좋아합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전면에 나오고 한 줄로 요약가능한 상황을 던진 뒤 이야기를 확장해가는 스릴러나 미스터리 말입니다. (이야기만 흥미진진하면 코미디나 호러나 멜로도 상관 없습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요약될 것 같습니다.
'표현 그대로 난간 위에 선, 절박하고 막막한 상황의 (그러니까 벼랑 끝에 선 상황의) 남자.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한다.'

여기다가 샘 워딩턴, 에드 해리스, 제이미 벨 같이 제가 관심있어 하거나 애끼는 배우들까지 캐스팅된다면 '필견'의 영화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직접 관람한 영화는 제 예상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였습니다. 여전히 좋은 배우들이 나오고 타이틀로 내건 아이러니한 상황이 재현되지만 초반부터 맥이 풀립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영화에 스릴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 스릴을 제공할 단초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굳이 가장 맥빠지는 형태로 보여준다는 느낌입니다.

스포일러 경고를 띄우고 썰을 풀어보자면, 샘 워딩턴이 연기한 닉 캐서디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감되어 25년형을 최종선고받은 전직 경찰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외출한 틈을 타 탈옥을 감행하곤 곧바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합니다. 그가 호텔 21층 난간에 올라선 건 순전히 그 계획을 위한 방법이었고요. 네.. 더 풀어보자면 마침 그 호텔 건너편에 그에게 누명을 씌운 부호의 빌딩이 있고, 그 빌딩 비밀금고에 그의 누명을 벗겨줄 핵심 증거가 있습니다. 그가 자살소동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린 사이 동생 일행이 금고를 털어 증거물을 빼오기로 한 거죠.

스포일러를 당했으니 맥이 빠진다고요? 글쎄요, 이 정보는 사실 영화의 '공식 예고편'만 봐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영화의 맥빠짐이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정보를 까고 나가선 안될 구도였어요. 적어도 스릴러로서의 제기능을 하자면 말입니다.

자 위에서 언급한 한 줄 요약을 이렇게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난간 위에 서있다. 그가 누구인지 왜 거기 서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가 절박한 상황이란 것을 알 뿐. 그리고 서서히 그의 비밀이 드러난다.'

여기엔 미스테리가 있고 물음표가 있습니다. 관객은 왜 그가 거기에 서 있는지 모르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죠. 그 물음표가 끊임없이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실지 영화 초반은 아무런 설명없이 호텔 객실로 들어서는 캐시디를 보여주며 그렇게 흘러가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곧 그의 제반사정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보여주면서 모든 설정들을 까발려 버리져. 이제 남는 건 그가 어떻게 자신의 누명을 밝힐 것인지에 대한 것인데 사실 이 부분은 설정들이 까발려진 상황에서 짐작하기 어렵지 않지요.

개인적으로 적어도 영화의 1/3 지점 까지는 캐시디가 누구이고 왜 그런 행동을 벌이고 있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은 불친절하게 나갔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캐시디의 관점이 아닌 엘리자베스 뱅크스가 연기한 형사 리디아 앤더슨의 시점에서 서술했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앞서 말했듯이 관객이 끊임없이 궁금증을 던지고 영화는 야금야금 단서들을 흘리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이 과정에서 캐시디 캐릭터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진짜 죽으려 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악당 같기도 하고, 뭔가 음흉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보이게 말이죠. 그렇게 되면 캐시디의 기묘한 행동, 대화, 프레임 밖의 사건들이 조금 더 미스터리 하면서 자신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힘을 가질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봤자 관객들은 예고편 다 보고 가는데 효과가 있겠느냐?란 반론이 가능합니다. 어차피 다 알고 가는 마당에 괜히 있는 척 해봤자 무슨 소용있느냐는 거지요. 예, 트릭을 알고 보면 화려한 마술쇼도 거대한 뻥카일 뿐입니다. 이 부분은 아마도 미디어 시대 거대자본 영화의 '이야기로서의 본질적 기능'과 '관객몰이를 위한 마케팅'의 충돌이 불가피 할 거에요. 어쩌면 처음 대본은 제가 바라던 대로 써졌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샘 워딩턴 같은 배우가 캐스팅되고 자본이 투입되면서 좀 더 쉽고 안전하며 마케팅에 용이한 형태로 변질된 건지도 모르죠. 게다가 뭔가 대단한 것처럼 늘어놓았지만 제가 말한 대안 같은 형식은 이미 많은 영화에서 써먹은 방식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아니라 6부작 정도의 시리즈로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요? 난간에 올라선 캐시디의 시간을 보여주면서 플래시 백으로 조금씩 과거의 사건들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별다른 설명 없이 양동작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거죠. 그러다가 중후반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고 영화에서 가장 공을 들인 라스트에 힘을 더욱 실어서 마지막 에피소드를 몰아치는 거죠.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영화에선 별 활약이 없는 리포터 역의 카이라 세드윅이 생각납니다. 엘리자베스 뱅크스랑 형사와 리포터 역할을 바꾸는 거죠. 그랬다면 더욱 그럴듯 했을 것 같아요. 아마도 카이라 세드윅을 보면 클로저의 반장마나님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익숙했던 배우들의 낯선 노안을 자주 보게 되네요. 얼마 전 MI4에서의 탐 아저씨도 그렇고 팅커,테일러...에서 게리 올드먼도 그랬지만. 이번 영화에서 악역으로 나온 에드 해리스도 부쩍 늙은 티가 나더라고요. 더 락에서 당당한 장군님 모습 보여줄 때만 하더라도 강단있고 당당해 보였는데 이 영화에선 종종 노약자 같아 보여서 집중이 힘들더군요. 막판 특정장면에서 '어허 그놈 연로하신 분에게 저런 심한 짓을'이란 생각마저 들었다니까요.

옆자리 꼬꼬마 녀석과 팔걸이 싸움 하느라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었어요. 영화관 팔걸이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야 오래된 것이지만 제 나름의 판단으론 옆 사람과 '반반'씩 나눠 쓰기 정도가 적당한 선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 녀석은 팔걸이를 너머 제 옆구리까지 아주 제 자리인양 쓰더군요. 게다가 안 하면 섭섭하지 싶었는지 스맛폰 질까지... 아호.... 행여나 애를 갖게 되면 어릴적부터 극장예절 하나는 확실하게 가르칠 겁니다.

네이버 영화란을 보니 동생 캐시디를 연기한 제이미 벨은 봉감독의 설국열차가,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 역할의 제네시스 로드리게스는 김지운 감독의 라스트 스탠드가 각각 차기작으로 올라와 있네요. 우연이겠지만 재미있으면서도 신기합니다.

동생 커플은 힘도 좋거니와 마법 가방들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별에 별 물건들이 달랑 가방 세 개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