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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ncy's critic

[영화] 화차 - 변영주/미야베 미유키


 

화차

변영주
(미야베 미유키 원작)

 

원작 소설 화차는 제가 두번째로 접한 미야베 미유키의 장편소설이자 미미여사의 소설 세계에 빠져 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소설이기도 합니다. 버블 붕괴 이후 화려한 잔치가 끝나고 시스템의 부실과 정책의 실패가 개인들에게 부채란 형태로 돌아오던 사회상을 반영한 사회파 미스테리인 원작을 제가 접했던 시기, 우리 나라 역시 IMF라는 암흑기를 간신히 빠져나온 무렵이었기에 무척이나 현실적인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카드빚, 제2금융, 사채, 개인파산 등의 용어들이 나열되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개인적으로도 익숙했던 것들이라 더더욱 갑갑하고 무섭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서로 십 여년의 차이를 두고 비슷한 상황을 겪은 한일의 시대적 유사성 덕분에 한국에서 영상화 되어도 시간 배경만 살짝 옮기면 큰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도 당시엔 했었고요. (법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태생적으로 일본과 유사한 한국이기에 이래저래 유리한 면이 많을 거고요)

 그렇게 다시 수 년이 지난 올 해 드디어 국내에서 원작이 영화화 된다기에 상당히 기대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료시사 + 관객인사'라는 이벤트가 겹치면서 이건 필히 봐야해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기어이 개봉전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보게 되었지요.

 
감독이 변영주라는 점은 개인적으론 의외였습니다. 그녀는 의식있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온 감독이지만 미스테리란 장르가, 그리고 미미여사란 원작자의 색깔이 감독 개인의 개성과 잘 매치가 되지 않았거든요. 결과적으론 기우였어요. 하긴 진짜 실력있는 사람은 뭘 시켜도 잘하긴 하더이다.

원작과 비교하여 감독이 직접 관장한 영화판 각색은 장단이 분명합니다. 일단 현지화 전략은 괜찮았습니다. 미미여사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캐릭터들은 적당히 변형되어 한국화되었는데 좋게 말해 열혈이고 나쁘게 보면 찌질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예로 강선영의 고향에 내려갔던 문호가 선영의 동창들과 마주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원작에선 점차 고조되는 극의 긴장감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간 하나의 과정이었던 부분이 영화에서는 캐릭터의 내적 감정이 아주 찌질한 형태로 터져나오는 방점이 되었죠.

원작에선 은행원이었던 문호 캐릭터를 동물병원장으로 바꾼 것도 괜찮았습니다. 일단 동물녀석들과 김별이 연기한 간호사 한나로 귀욤귀욤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좋고. 병원이란 환경으로 불길한 상징을 넣기에도 좋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직장인이 특히나 은행원이란 게 아무리 결혼 전이라지만 영화에서처럼 열일 제쳐두고 띵까띵까 할 수 있는 속편한 자리가 아니죠. 원작처럼 철저히 의뢰인 입장에 두고 조연으로 물러둔다면 몰라도 이선균 캐스팅해서 화면에 많이 비치게 하려면 전문직 그것도 자기 가게 가지고 있는 사람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겁니다. (물론 원작에서 은행원이란 직업을 택한 건 소재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일관성을 위함이 있었다는 부분에서 아쉬움도 있지요)

가장 아쉬웠던 건 결말이었습니다. 미미여사 특유의 인간미가 느껴지면서도 여전히 불길한 여운을 남기는 원작의 결말은 화차란 소설이 가지는 매력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읽은 지 한참이 지나서도 '화차'란 제목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저에게 그 엔딩의 이미지였지요. 미스테리가 풀리고 진상이 드러난 후 드디어 탐정이 범인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에서 딱 잘라버리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은 미완이지만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마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바로 그 지점에서 엔딩이 시작되더군요. 마술공연장에 경찰 인력이 깔리는 부분부터 조금 불안하다 싶더니 영화는 헐리웃식 반전을 꾀합니다. 그리곤 드디어 대단원이 마무리되는 용산역 챕터에서 필요이상의 시간을 할애하며 관객을 지치게 만들죠. 일단 길게 이어진 에스컬레이터 앞 시퀀스는 넘어갈 수 있어요. 너무 수다스럽게 주절 거리던 두 인물의 대화 덕에 그때까지 쌓아올린 경숙이란 캐릭터의 매력이 무너지긴 했지만 그래도 관객들을 위해 어느 정도 친절할 필요가 있는 상업영화의 미덕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원작보다 멜로 라인을 강화한 만큼 그런 식의 신파가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뒤이은 맥빠지는 추격장면은 너무 길었어요. 감독도 루즈함을 느꼈는지 이런저런 장치들을 활용하긴 하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었습니다. 사실 원작의 이야기 자체가 뭔가 빵빵 터지는 구석은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잔잔한 긴장을 뭔가 한껏 고조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겠구나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살짝 지루해질 만큼 늘어지고 설정이 억지스러웠죠. 대중들은 친절하게 하나하나 짚어주는 결말을 원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일히 떠먹여주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요. 게다가 김민희 캐릭터의 결말은... 왜 이리 한국영화는 몰인정하답니까.


생각난 김에 원작의 결말부만 옮겨 봅니다.

- 겨우 찾아냈다.
드디어 그녀를 만난다.
(중략)
무엇을 물을까는 문제되지 않는다. 나는 자네를 만나면 자네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자네 혼자서 힘겹게 등에 짊어지고 왔던 이야기를. 도망 다녔던 세월 속에서, 숨어 지내던 세월 속에서, 자네가 비밀리에 쌓아 왔던 이야기들을.
시간이라면 충분히 있다.
그녀의 어깨에 타모츠가 손을 얹었다. (화차, 시아출판사, 박영난 번역)

(설마요... 결말이 그렇게 된 건 조성하가 본론 가기도 전에 달린다고 힘을 다 빼버린 탓이었음)

소재나 설정들은 앞서 말했다시피 일본의 버블이후 잃어버린 10년과 우리나라 IMF 이후가 동일한 판본의 다른 색 판화를 보는 느낌이라서 그대로 유지해도 무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양국간의 차이가 분명히 있고 특히 한국의 제도적 특성 하에선 무리가 있는 설정들이 있습니다. 특히 '타인의 인생을 훔친다'는 부분 말입니다. 영화에서도 이에 대해 불안했는지 이래저래 변명을 늘어놓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건성 넘어가더군요. 네, 극중 선영의 계획은 원작이 씌어진 시대의 일본에서라면 몰라도 한국에선 매우 힘든 일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한국이란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전국민 지문 데이터를 국가가 관리하는' 곳 아닙니까.
타인으로 합법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주민등록증' 재발급을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그거 없으면 기실 아무 것도 못하죠. 가짜를 만들면 된다지만  관공서에도 먹힐 가짜 신분증 만들 재주라면 굳이 남의 신분을 훔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제법 그럴듯한 트릭을 만들어 봤었지만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더군요.
(화차 개봉에 맞추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소설과 유사한 국내사례를 다룬 모양인데 한 번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대인사가 있던 상영이라 변영주 감독과 이선균 김민희를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이선균 목소리는 역시 좋더군요. 김민희는 생각만큼이나 컸고 생각보다 더 말랐고요. 그런데 이선균이야 그렇다 치고 김민희는 그냥 예쁜 일반인 느낌이었어요. 인사말이 꼬이자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도 그렇고 예전에 무대인사에서 봤던 전도연의 연신 '연옌연옌' 광선을 발사하던 모습과는 달리 실제에서 스크린보다 훨씬 편한 이미지의 배우였습니다.

일본에서 개봉할까요? 아마도 하겠죠. 일본 현지에서의 반응이 어떨지 매우 궁금합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원작과 비교하고픈 욕망이 불끈불끈 솟아서 박스에 들어 앉았던 책을 다시 꺼냈습니다. 재독하게 되면 아마 영화의 감상도 조금 바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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