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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ncy's critic

더 그레이 - 조 카나한


더 그레이


(2012)

 

관람 전 영화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고 봤더랬습니다. 사전에 리암 니슨이 나오는 재난 영화 정도로만 정보를 얻은 상태에서 극장을 향했거든요. 재난에 비행기가 떨어지고 한파가 몰아치고 늑대가 습격한다 정도도 알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사전에 예상한 것과 본 영화는 많이 달랐어요. 그런데 그 다름이 틀림은 아닌지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엔 예상 밖의 '물건'을 건졌다는 묘한 쾌감이 들더군요. 이건 작년에 '한나'를 봤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떡복이 가게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고추장 스파게티가 나와서 실망했다가 맛을 보곤 '우오오 이런 신세계가!' 감탄을 터뜨리는 경험?

 

재난영화라 칭할 때에 보통은 '거대한 재난 앞에서 작아지는 인간 군상과 그런 혼돈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스토리'를 예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잖아요, 외계인이 침공하고, 화산이 터지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지구가 대홍수로 물에 잠겨도 결국 결론은 생존과 희망의 메시지인 경우가 보통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측과 빗나갔을 때에 관객은 실망하고 때론 '이건 재난 영화가 아니라 영화가 재난이다'라고 불평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더 그레이는 분명 후자에 속하는 영화고요.

일단 처음 시작은 알라스카 즈음 석유 시추 현장에서 본토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른 주인공 오트웨이(리암 니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늑대 사냥꾼으로 인간을 먹잇감이나 영역에 침범한 잡것들 정도로 생각하고 덤벼드는 늑대들로부터 회사 직원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죠. 그는 자신의 직업도 인생도 회의를 느끼고 떠난 부인을 그리워하며 자학과 우울에 빠져 있습니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비행기 추락 사고와 극한의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이러니가 이야기의 중심 뼈대가 됩니다.

 

초반부 오지, 석유시추회사,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이는 마초들, 비행기 추락이란 점들을 이으면 얼마전에 리메이크된 '피닉스의 비행'이 떠오릅니다. '피닉스'가 사막이었다면 더 그레이는 알래스카 빙원이란 점이 다르겠네요.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탈출하는 '피닉스'와 달리 더 그레이는 끝까지 절망적인 상황만을 던져줍니다. 앞서 말했지만 영화는 희망 보다는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대자연의 힘과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데에 치중합니다. 비행기 추락 이후 타이틀이기도 한 회색늑대들이 등장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재난 보다는 호러에 가까워집니다. 추락한 비행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늑대 무리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 늑대놈들이 덩치도 크고 머리도 뛰어나며 숫자도 많은 거죠. 이런 부분은 에이리언2020이란 제목으로 개봉한 '피치 블랙'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호러영화에서 종종 써먹는 프레임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공포 영화로서 꽤나 효과적인 장면들을 여럿 보여주는데 중후반부 까지도 이런 공포영화로서의 힘은 관객의 관심을 사로잡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괴물과의 대적, 그리고 오지로부터의 탈출이란 소재를 생각하면 기존의 호러 공식에 따라 살생부를 작성하고 적당히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가운데 마지막 극적으로 생환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겁니다. (뭐 엔딩 무렵에 깜작 효과로 속편을 기약하거나 아예 생존자까지 죽여버리는 변주도 가능하겠죠) 영화는 처음엔 얼핏 이런 공식을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아니 후반부 까지도 얼개로만 치면 공식을 따르고 있어요. 하지만 깜짝쇼와 호러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죽음은 기존의 몬스터 호러들과 달리 각각 스토리와 무게를 지니고 둔중하게 관객의 마음을 누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는지 모릅니다. 영화는 정말 징글맞을 정도로 삶과 죽음이란 주제에 대해 정면으로 파고 드는데요 이런 성향은 사실 영화 초반부터 대놓고 드러내기도 합니다. 비행기 사고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한 출혈로 실혈사하게 생긴 동료에게 오트웨이가 내뱉는 대사를 보세요.


"자넨 죽어가고 있어, 그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시작부터 영화는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묘사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죽음들도 결코 장치로만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그런 과정과 서사들이 너무 사실적이고 직설적이라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지요. 정말 마지막까지 영화의 인물들이나 관객들에게 무력감과 절망감을 선사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재난에 처했다고 발버둥치지마 못 살거야 아마'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시니컬하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남은 동료를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하지만 또 어디선가 분명 있었을 것 같은 사고로 눈 앞에서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오트웨이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절망합니다. 신이란게 있으면 뭐라고 신호라도 보내보라며 성질을 부리고 절규합니다. 그리고는 죽은 이들의 가족에게 생존하게 되면 돌려주려 모아두었던 유류품을 가지런히 바닥에 정돈하죠. 마치 성소를 쌓아 올리듯 또는 무덤을 세우듯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거대한 절망 덩어리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오트웨이 앞에 나타납니다. 사실 전 그가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결말도 생각했어요.

 마지막 오트웨이의 행동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고 암전 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잠깐 보여주는 장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영화는 관객에게 나름의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듯 보입니다. 어쩌면 마초이즘적 파국의 결말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작은 희망을, 거대한 자연 앞에서 여전히 작지만 그럼에도 굽히지 않는 인간의 생존의지를 내비친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