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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ncy's critic

[영화] 은교 - 정지우

은교 - 늙은 게 죄냐 솔로가 죄냐

CGV


정지우



70대 노인과 여고생의 관계 그걸 사랑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더러운 스캔들이라고요!


꽤나 자극적인 예고편의 대사가 요약하듯 영화는 국민시인으로 칭하여지며 존경받는 70대 노령의 작가와 풋풋한 여고생 그리고 시인의 제자인 청년이 얽힌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자극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일단 설정에서 얼른 로리타 콤플렉스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류의 이야기는 아니에요. 은교를 바라보는 시인 적요의 시선은 물론 욕정을 동반하고 있지만 그것을 창작이란 방식으로 승화시키죠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은교는 성적 대상이라기 보다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말년에 찾아온 뮤즈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공대출신' 문하생 서지우가 끼어들면서 복잡해지고 또 찌질해집니다.



박해일의 70대 노역 분장과 연기는 평가받아야 하겠지만 (저는 처음 포스터를 접한 순간 가장 먼저 '이끼'에서 정재영의 노역분장이 떠올랐어요. 함께 연기했던 박해일이 거기서 어떤 자극을 받은 건 아닐까 하는 망상이죠) 그보다는 역시 타이틀롤인 은교에 눈길이 먼저 갑니다. 한은교 역의 김고은은 화면에 잡히는 외양에서 묘한 매력을 가집니다. 아마 캐스팅에 있어서 꽤나 신경을 썼을 터일 이 역할에 생짜 신인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뭔가 있겠구나 기대하게 되잖습니까. 화면 속 은교는 매력을 넘어 마력을 가집니다. 신비로운 첫 등장에서부터 확실히 존재감을 심어준 후로 보여주는 모습은 요즘 아이 치고는 지나치게 순진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영화 속 남자들이 그렇게 무너져 내리게 하는 마력이 있어요. 여긴 아주 작정하고 들이미는 연출과 카메라의 노고도 한 몫 했을겁니다. 적어도 영화 중후반까지 전 이적용에 감정이입한 채 은교에게 푹 빠져버렸을 정도니까요. 그러다보니 후반 적요의 생일파티 장면 뒤에 이어지는 국면 전환에서 괜히 화도 나고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그러더군요. 순간적이나마 내 저놈을 갈아마셔 버려야...라며 필요 이상으로 극중 캐릭터에 분노하기까지 했어요. 


결말을 짓기 위한 전환점인 이 장면은 은교의 캐릭터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갈등이 요약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적요에게 은교는 뮤즈이자 짝사랑입니다. 욕정의 대상으로서 은교는 일부일 뿐이죠. 적어도 그가 가지는 감정은 사랑에 가깝습니다. 사회가 그 관계를 어떻게 평가할 지는 차치하고서라도요. 반면에 지우에게 은교는 그저 굴러들어온 떡일 뿐입니다. 적요의 소설 '은교'처럼 말이죠. 그냥 거기 그 애가 있었고, 그런 상황이 있었고 그저 '외로워서'라는 핑계로 그렇게 행동하는 거죠. (억 단위 수입을 올리고 미디어에서도 밀어주는 반반한 외모에 몸짱 작가가 외롭다니요. 설마요.) 그의 동인은 순수하게 욕정입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적요의 모습에서도 양가적인 감정이 느껴집니다. 그냥 조용히 돌아서도 될 순간 그는 기를 쓰고 그네들의 모습을 확인하려 들지요. 그 결말은 결국 비극이고요.


지하서재를 훔쳐보던 순간 적요의 모습에 감정이입하게 되는 건 모태솔로라는 개인적 처지도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외사랑으로 마음조차 전달치 못하는 이성이 다른 이와 몸을 섞는다는 현실은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극이겠지만 동시에 억눌리고 뒤틀려 사라진 줄 알았던 욕정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하는 자극제이기도 한 거죠. 어쩌면 잠시나마 지우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질투, 좌절, 흥분, 욕망이 뒤섞인 순간의 박해일의 연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어요.


지우는 욕망 덩어리죠. 그는 재능은 없지만 그 공백을 강렬한 욕망으로 채우려는 인물입니다. 그는 존경받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글을 쓰는건 그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죠. 제대로 창작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처지에 놓일 이유도 없어요. 물론 처음엔 순수하게 적요 같은 글을 쓰고 싶어했는지도 모르지만 (다 같은 별이 아님을 깨닫고 싶었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 순간 뒤틀어진 욕망이 그런 식으로 다른 곳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거 같습니다. 욕망의 전차에 몸을 실은 인물은 결국 이성보다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거죠. 동시에 적요를 향한 그의 존경과 사랑은 여전했을 겁니다. 그런 아이러니가 그를 힘들게 하고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겁니다. 아마 은교가 아니었더라도 둘의 관계는 언젠가 틀어지고 말았을 거에요. 모짜르트와 살리에르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스승과 제자로 등장한 박해일과 김무열은 작년 히트작 '최종병기 활'에서 친구이자 매부처남 사이로 출연했죠. 이전작에서의 관계를 떠올리면 참 묘한 조합이란 생각이듭니다.


연관검색어로 떠오르는 노출수위는 한국영화치고 높아요. 기사에서 이미 언급된 것처럼 성기,음모 노출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이란 느낌은 없더군요. 심지어 음모가 노출되는 장면은 정사씬이었는데 말이죠. 물론 굳이 그런 수위의 노출이 필요했는가에 대한 물음에선 아쉬움이 있습니다.


의도된 부분이겠지만 계속 '은교는요...'라는 식의 대사가 계속 나오는 건 좀 웃겼어요.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요 아직 보진 못했지만 영화를 보고나니 원작이 궁금해집니다. 영화에선 생략된 의식의 흐름이나 감정선이 좀더 분명해질 거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