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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ncy's critic

나는 아빠다 - 전만배, 이세영


나는 아빠다

 

전만배 이세영

짐작이긴 합니다만 시나리오 마켓 추천작으로 뽑혔다는 이 영화의 원작 시나리오는 영화보다 훨씬 좋았을 겁니다. 아니 좋지는 않더라도 말은 되는 시나리오였을 겁니다. 영화 제작이란게 보통 원안을 두고 지속적인 수정을 거치는 모양이더군요. 원래의 시나리오 그대로 영상에 옮겨지는 경우는 감독이 각본까지 쓰는 경우라도 좀처럼 없지요. 많은 예산이 들어간 상업영화라면 더욱 그럴 겁니다. 대중의 취향에 맞게 수정되어야 할 것이고, 제작 여건에 맞춰 그러니까 예산의 한계에 맞춰 조정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여기에 투자자 및 제작자의 입맛도 맞춰야겠지요. 거기다가 이름 좀 있는 배우들이 들어오면 배우와 소속사 입장도 생각해줘야 합니다.

아마도 그랬었나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사공이 많다보니 산으로 가버렸습니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사건을 빨리 해결하려 증거를 조작하고 때로는 범인에게 돈을 받고 가짜 범인을 만들기도 하는 비리형사 한종식은 어느 재력가의 아들이 연루된 살인사건의 진상을 덮기위해 목격자였던 마술사 상만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상만이 2년간 복역하는 사이 그의 딸은 사고로 죽고 아내는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하다 식물인간이 되지요. 그리고 때마침 무죄를 증명하는 증거가 우연히 나타나 상만은 출옥하게 됩니다. 당연히 복수를 생각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 하나가 추가됩니다. 종석이 그렇게 비리를 저지르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가 심장이식을 받아야 하는 아픈 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종석의 딸을 살릴 심장기증자 조건에 딱 맞는 사람이 식물인간이 된 상만의 아내라는 거지요.

일단 지나친 우연의 일치에 대해선 넘어가겠습니다. 이런 설정은 영화에서 어느정도 봐줄 수 있잖습니까. 그걸 잘만 풀어내 좋은 이야기로 만든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좀 진부하고 어거지 스럽긴 하지만 벌려놓은 판은 얼마든지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어 보입니다. 부성과 부성의 대결, 뇌사자의 생명과 이식을 기다리는 이의 생명에 대한 저울질, 비리 형사가 얽힌 사건의 서스펜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관객은 1시간 반동안 두 아빠가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을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합니다. 아니 아빠들 만이 아닙니다. 극중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멍청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제 역할을 하는 임하룡이 연기한 형사도 허무하게 죽어나가고요.

시나리오는 전력을 다해 파국으로 나가려 합니다. 종석은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그냥 멍청하고 나쁜 인간입니다. 딸 때문에 비리형사짓을 한다지만 그의 아내는 역시나 증거를 조작해 누명을 씌어 옥살이를 하게 했던 남자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딸은 그 현장을 지켜봐야 했고요. 정상적인 머리를 가진 남자라면 딸을 위해서라도 형사짓을 그만두고 다른 돈벌이를 강구해야 했습니다. 병원에 꼼짝없이 누워있을 딸이 아내와 같은 꼴을 당하리란건 자명하잖습니까? 실지로 그렇게 되는 듯 보이고요.
상만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한없이 순수하고 착한 인물입니다. 그런 남자가 복수를 하려니까 일이 꼬입니다. 이 더러운 세상에 순수하게 정직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다 못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요. 그는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그러는 사이에 모든 상황은 점점 나빠집니다.
이야기의 조율도 엉망입니다. 설정을 본다면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이식과 관련한 아이러니한 상황과 거기에 얽힌 서스펜스일 겁니다. 나쁜 예이지만 심장이 뛴다 같은 영화를 보세요. 적어도 관객이 원하는 것을 얼른 내보이고 빨리빨리 진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뻔이 그 이야기를 할거면서 지지부진 끕니다. 이식에 얽힌 아이러니가 밝혀지는 건 종석의 경우 1시간이 거의 지날 무렵이고 상만은 거의 끄트머리에 가서입니다.

정말 보는 게 곤욕일 정도로 멍청한 일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나마 상만의 멍청함은 이해라도 가지 종석은... 그래도 좋다 이겁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더러운 세상. 운운 하면서 진짜 파국으로 치닫는 방법이 있습니다. 잘만 하면 예술 한 번 할 수도 있지요. 복수는 나의 것 처럼요.

이 영화가 진짜 산으로 가는 순간은 엔딩으로 이어지는 클라이맥스입니다. 엉뚱하게도 두 아빠가 전부 딴짓하는 사이에 이식수술이 이루어지고 상만은 이식수술 후 차도가 좋지 못해 의식불명인 종석의 딸을 유괴해 병원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을 겁니다. 적어도 관객들은 종석의 딸이 그의 손에 의해 죽진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정말 파국으로 가려면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만요) 그래도 상만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할 수도 있고 종석에게 감정적 복수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대국민 담화라도 하던가요. 정말 말도 안되게 그의 시위 현장에 경찰들이 몰려오고 구경꾼에 방송사 카메라, 헬기까지 동원됩니다. 다른 건 다 그렇다치고 방송사들은 언제 어떻게 알고 왔으며 대체 어떻게 극중에 나오는 앵글로 촬영을 했답니까? 한편 종석은 그동안의 비리가 밝혀지고 그 과정에서 살인까지 저질러서 이제 경찰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그는 병원 반대편에서 상만과 딸을 보고 있지요.
일단 넘어가고 그렇게 뭔가 거창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판을 벌이고 영화가 하는 짓은... 차마 글로도 쓰기 민망합니다. 스토리 설정에서 상만이 마술사라고 했지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이 설정이 (전 개인적으로 그가 마술 트릭을 이용해 종석의 딸을 유괴하고 복수를 벌이는 내용을 상상했습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느닷없이 등장해서 그는 거기서 의미없는 마술쇼를 벌입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아 죄송합니다. 의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가 아내가 살아있을 때 한 약속이 있어요. 감옥에서 나가면 지상 최대의 마술쇼를 아내와 딸에게 보여주겠다는 약속이요. 그러니까 죽은 아내의 심장을 이식받은 종석의 딸에게서 자신의 딸을 겹쳐 보며 마술쇼를 벌인다... 뭐 이따위 설정인 거 같습니다. 그나마도 앞뒤 상황이 아구가 맞고 감정의 조율이 잘 되었다면 천박하고 촌스럽더라도 감동이 있을 수 있겠는데 그마저도 없습니다. 진정 관객들은 시나리오라는 배가 산 정상에 가있는 것을 보게 되는 거지요.
뭐, 종석에게도 나름의 엔딩이 주워집니다. 그가 벌인 악행의 카르마 격인 정보원이 난데없이 등장해서 그를 칼로 찔러 죽이는 거지요. 이건 아마도 보다 파국적이고 이치에 맞았을 원안 시나리오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좋은 아빠가 아니었고 좋은 인간도 아니었으니 이런 식의 엔딩이 어울리거든요. (그나저나 엔딩의 나레이션은 소름이 돋습니다. 아이코.. 소름이 아니네요 닭살이었습니다.)

극중 복수를 위해 상만은 불법총기를 입수합니다. 딱 봐도 22구경 정도 되어보이는 포켓총인데요. 이걸 '경찰'인 종석이 몰래 가져가 누군가를 죽이려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총기에 대해 아주 기초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총으로 누굴 죽이기 위해 매우 근거리에서 사격하거나 아니면 엄청난 사격술로 머리나 심장을 직격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짓은 초짜 깽이 나 총있다고 과시할때 하는 행태입니다. 상대가 그렇게나 싹싹 도망치는 것도 당연합니다. 게다가 이 총은 대체 몇 발이 장전되는 건가요. 처음 입수 장면을 보면 여분의 탄약은 없었던 것 같고. 22구경이라면 경찰이더라도 종석이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영화 내내 이 총은 불을 뿜어댑니다.

최정윤이 연기한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도 멍청한 캐릭터입니다. 간호사들에게 선배소리 듣는 거 보니 전직 간호사였던 모양인데 전혀 프로페셔널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감정에 휘둘려 멍청한 소리나 해대고 정보를 줄줄 흘리고 다니고... 하긴 영화속 세상 자체가 좀 멍청해 보입니다. 심장이식 수술을 마치고 종석의 딸이 차도가 좋지 않자 그녀가 어딘가와 통화를 하는데 종석이 나타나 딸의 안위를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거기서 최정윤의 답이란 게...
'상태가 좋지 않아요, "큰병원"으로 옮겨야 겠어요.'
아놔... 방금 심장이식 수술을 하지 않았나요? 대체 심장이식 수술이 가능한 병원보다 더 큰 병원은 어디랍니까? 아니면 요즘은 동네 의원이나 지역 병원에서도 심장이식 정도는 척척하는데 사후 관리는 큰 병원이 더 잘하는 건가요?

영화 제작 과정에서 시나리오에 손을 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서두에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발이지 그 손길이 개선을 향해 갔으면 합니다. 이분 저분 취향 맞추다가 너덜너덜 걸래처럼 헤어져 산으로 가는 시나리오로는 영화를 찍어선 안됩니다. 이건 이분 저분들을 위해서라도 해선 안되는 일이고 관객들에게도 예의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