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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ncy's critic

블라인드 - 안상훈


 

블라인드

안상훈

불의의 사고로 의붓동생과 시력을 동시에 잃은 경찰대생 수아는 뺑소니 사건의 목격자가 됩니다. 자기가 부른 택시인 줄 알고 탔던 차가 무언가를 치었고 기사는 신고를 하려던 그녀를 말리다 황급히 도망간거죠. 그리고 수아는 택시가 친 것이 아무래도 사람 같습니다. 동시에 관객들은 영화 속 현실에서 벌어지는 연쇄실종사건의 범인이 그 택시기사란 것을 알고 있지요.

장님 목격자란 설정은 진부할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이미 훌륭하게 다루어진 기존의 작품들이 존재합니다. 오드리 햅번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메들린 스토우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겁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이 설정의 변형격인 벙어리 목격자를 다룬 영화도 떠오를 거고요.

그만큼 장님 목격자란 설정은 매력적입니다. 목격이라고 할때엔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시각정보이고 대부분의 결정적 목격증언 역시 그렇습니다. 시각은 우리가 가장 많이 의존하는 감각이며 그만큼 많은 정보량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 정보가 차단된 인물이 중요한 사건의 목격자라는 지점부터 추리의 요소가 끼어듭니다. 증인임에도 당사자는 자신의 목격한 사건을 추측해야 하니까요. 더불어 범인의 입장에서도 상대가 사건은 알고 있어도 자신의 얼굴은 모른다는 조건이 매력적입니다. 얼마 전 개봉한 줄리아의 눈에선 이런 조건을 십분 활용했죠.

하지만 매력적인 소재엔 늘 함정이 있습니다. 소재의 독특함에 너무 의존하여 안일하게 나아가단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 나오기 딱 좋거든요. 블라인드는 적어도 이 지점에서 모범적으로 빠져나온 작품입니다. 시각장애란 설정을 적절히 활용하면서도 미스테리 스릴러란 쟝르의 힘을 우직하게 밀고나갈 줄 알아요. 장치들은 정교하게 배치되고 적절하게 사용되며 사건의 배치도 억지스러움이 없습니다. 캐릭터들도 정형화되어있고 신파적 요소가 있지만 일반 관객이 적절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잘 조율되었고요.

일단 캐릭터의 형성에 전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뻔한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높은 감정이입을 끌어낸다는 건 캐릭터 구성의 성공입니다. 사실 좋은 영화들은 특별하거나 별난 소재보다는 원형적이거나 전형적인 방법으로 캐릭터를 구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교가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기본기가 탄탄한 쪽에게 밀리기 마련인 거죠.

캐릭터 구축의 방식도 방식이지만 배분도 훌륭해서 중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두 명의 주요 캐릭터의 최후에서 관객들이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던히도 죽어나가는데 '어 죽었나보네...'라고 덤덤하다 못해 지루하게 느꼈던 7광구와 무척이나 비교되더군요.

스릴러적 장치들도 훌륭했습니다. 무엇보다 범인이 아주 매력적인데 저지르는 범죄 자체는 참 뻔하고 지루해 보이는 녀석이 수아에게만 붙으면 매력적인 악마로 변신하더군요. 유승호가 분한 기섭이 습격을 당해 앰뷸런스로 실려가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범인이 느닷없이 등장하자 객석에서 기겁을 하는 탄성이 터져나오더라고요. 영화엔 이렇게 빛나는 서스펜스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블라인드는 자신이 다루는 소재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잘 아는 프로의 작품입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잘 굴러가고 설정은 지나치지 않으며 디테일이 살아있어요. 독특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정공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불필요하게 튀려하지 않은 점도 좋았고요. '추격자' 정도의 충격은 없었지만 극장에서의 두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매끈하게 빠진 스릴러임에는 분명합니다.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한없이 샤방샤방하게 그려진 주인공의 집이라던가. 갑자기 실명한 보육원 출신 장애여성이 3년간 대체 뭘 먹고 산 것인지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다거나 하는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겁니다. 후반부 수아와 범인의 대결 장면은 너무 길고 종종 늘어집니다. 아무리 훌륭한 서스펜스도 계속되면 보는 입장에서 지치기 마련이거든요. 범인 캐릭터에 대한 설명의 부족도 아쉽습니다. 물론 관객으로 하여금 유추/상상할 여지는 있습니다. 정보도 충분히 주었고요. 아쉬운 점은 그렇다고 쳐도 범행 자체가 너무 연극적이라는 거죠. 수아와 있을 때는 정말 무시무시한 악마 같다가도 다른 장면에선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중2병 걸린 아이 같아 보이거든요.

자잘하게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유승호겠죠. 의경 머리가 그게 뭐랍니까. 수아가 어떻게 복학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좀 아쉽고요. (범인을 잡은 공로로 윗선에서 빽좀 써준걸까요?)

마지막 장면을 보고있자면 영화 전체가 파일럿이거나 연작의 첫번째 작품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맹인 미녀형사 시리즈라니 꽤나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사이드킥은 꽃돌이 소년이고.

엔딩 크레딧에서 갈매기 형사의 이름이 나오는 장면은 웃겼습니다. 아.. 그런 장면에서 웃음이 터져나오게끔 배치하다니 조금 악랄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ㅋ

조희봉도 원장으로 나온 김미경도 그리고 악역을 연기한 배우도 그렇고 조연 연기자들이 무척이나 잘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조역은 슬기역의 달이겠지요.

영상통화를 활용한 추격장면을 촬영한 곳은 어디인가요? 극중에선 분명 '삼송'역이라고 안내방송이 나온 것 같은데. 실제 장소를 사용하자니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변형한 걸까요. 아님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것도 아니면 진짜 삼송역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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