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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ncy's critic

통 증 - 곽경택, 강풀 원안


통증

 

 

 

곽경택

통증은 곽경택 감독 보다는 원안을 제공한 웹툰작가 강풀의 색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권상우 정려원 같은 유명배우가 투톱으로 등장하고 곽경택이란 네임밸류를 인정받는 감독이 붙었는데도 90분 내내 보이는 건 강풀의 그림자예요.

어릴적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남진은 사고에서 미처 구하지 못한 누나에 대한 죄책감에 누나의 이름인 남순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사고후유증으로 통각을 느끼지 못하는 증상을 보이고 그런 신체적 특징을 백분활용해 자해공갈로 사채빚 받아내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채무자 중 하나인 혈우병 환자 동현을 만나게되고 이 둘은 강풀의 순정만화 시리즈에 나올법한 쿨한듯 하면서 신파이고 아기자기하면서도 동시에 구질구질한 사랑을 나눕니다. 결말은 강풀식 파국이고요.

애초에 강풀이 순정만화 사리즈의 일환으로 연재계획을 잡아두었던 이야기를 원안으로 영화 각본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여튼 이런 사정 때문에 영화의 장단도 정확히 강풀 만화의 장단과 일치합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해 항상 상처 투성이인 남자, 그리고 조그만 상처 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병에 걸린 여자. 상반되는 현실을 사는 두 인물이 서로를 알아가고 상처를 감싸안는다는 이야기 구조는 흥미롭습니다. 참 강풀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으로 죽은 부모님이 병원비 충당하다 남긴 빚을 갚아나가며 자신도 혈우병으로 고생하는 동현이나. 눈앞에서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은 장애를 안고 살며 제대로 된 인생의 경로에서 빗겨나버린 남순이나 모두 지독하게도 불행한 인간들입니다. 현실이었다면 진즉에 자살을 택했거나 더욱 나쁜 선택들을 했을 인물들은 하지만 묘하게도 착한 삶을 살아갑니다.

동현은 캔디마냥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으며 꾸준히 미래를 계획하고 남순은 몸이나 인생이나 마구 굴리는 듯 하면서도 과거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다른 사람을 때리진 못합니다. 심지어 남순을 철저히 이용해먹는 범노도 결정적인 순간엔 거의 자기 희생적 모습을 보이며 그를 구하려 하지요. 이건 완벽한 강풀식 판타지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잠언을 진리로 여기는 듯 살아가는 인물들 말입니다.

현실에선 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착한 군상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지 않은가 희망을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동으로 이야기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강풀의 작품들은 한번 손에 들면 지루한 줄 모르고 끝까지 보게 되는 스토리텔링이 강점이지만 동어반복처럼 반복되는 착한인물들과 동화적 환상 때문에 아무리 잔인한 소재들을 다루거나 그보다 잔혹한 현대사를 다루어도 마지막엔 백일몽을 꾼듯한 느낌을 주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단점이 반복되고요.

결말도 그렇습니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착한 주인공들의 의지와 달리 꼬여버린 이야기들로 맞게 되는 파국은 얼마전 연재가 끝난 그의 웹툰 '당신의 모든 순간'의 결말처럼 수용자의 눈물샘은 자극할 망정 더 이상의 고민은 유보시켜 버립니다. 실질적인 결말이 아닌 그냥 파국인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대요 운운하는 낙관주의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죽음이 작은 의미를 가졌으면 하는 겁니다. 눈물샘 자극을 위한 기능적 죽음이 아니라 말이죠. 사실 이런 식의 결말에 가슴이 따뜻해진다는 눈물이 핑 돌더라는 평은 저로선 동감하기 힘들단 말입니다. (내가 문제가 있는 건가...)

권상우의 연기는 의외로 좋습니다. 바보의 승룡이를 연상시키는 어눌한 말투에 자신의 속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남순이 캐릭터는 것멋 가득한 기존의 권상우 연기에서 느끼지 못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가 권거지 소리를 듣던 모 영화에서마저도 그의 연기엔 후카시가 가득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죠) 이제 그는 제대로 망가질 줄 아는 '연기자'의 모습을 제법 보여줬어요. 이 정도 했는데도 연기가지고 욕을 들어먹는다면 그건 순전히 권상우의 외모가 너무 잘나서입니다.

반면에 정려원은 캐스팅 미스입니다. 안스러울 정도로 말라 비틀어진 그녀의 몸이 혈우병환자 캐릭터에 어울리겠다는 계산은 너무 단순해요. 영화 내내 그녀는 그냥 화보집에서 끄집어낸 것 같습니다. 캔디처럼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연출한 모델, 가난한 거리의 노점상을 연기하는 모델, 죽을 병에 걸려 숙명적 사랑을 갈구하는 컨셉 촬영 중인 병적외모의 모델. 안타까운 건 현재로서 그녀가 이보다 잘 할 것 같진 않다는 거죠. 아직은 연기변신보단 자기 이미지에 맞는 역할로 경력을 더 쌓아올려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일단 강풀 원안인 만큼 이야기가 술술 흘러가요. 중간중간 코미디도 괜찮고 아구도 그럭저럭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인상적인 장면들도 몇몇 있고요. 아기자기한 소품입니다. 어중간한 정도의 이상을 가진 작품이고요. 특별히 나쁘지도 그렇다고 딱히 좋다고도 할 수 없지만 시간은 잘가더라 하는 영화들 있잖아요.


강풀 작품의 팬이라면 추천을 합니다. 앞서 제작된 강풀 원작의 영화들 보다는 확실히 재밌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