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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ncy's critic

딸기 아이스크림 - 지병현


딸기 아이스크림

 

 



KBS 드라마 스페셜

지병현


드라마스페셜, 베스트극장 등등... 이름이야 바뀌지만 여튼 이런 프로그램은 단막극의 형태를 통해 신선한 기획,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딸기 아이스크림은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제목과는 달리 마냥 말랑말랑한 드라마는 아닙니다. 같은 직장에서 비밀 연애 중인 기정과 준경은 이제 막 연애 3년차를 맞이한 커플입니다. 둘은 처음 만남부터 서로에게 끌리며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지만 현실은 자꾸만 둘 사이를 훼바놓습니다. 특히나 기정은 준경에 대한 마음과는 달리 중요한 순간마다 일이 꼬이며 약속에 늦어버리는 거죠. 오죽했으면 어쩌다 시간에 맞춰 나온 날 숨어서 그를 지켜보던 준경에게 '내가 기다리는 거 처음인가? 나름 괜찮네 천천히 와'따위의 문자를 보낼 정도니까요. 처음에야 콩깍지에 씌이기도 했고 기정의 사정을 뻔히 아는 입장인지라 딸기 아이스크림 한통을 벌칙삼아 받아먹으며 넘기던 준경도 3년쯤 되다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겠지요. 3주년 되던 날 또 다시 약속에 늦은 기정에게 헤어지자는 말은 던집니다. 결국 기정 홀로 오르게 된 버스는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이 시점에서 시작해 준경의 시점으로 이들의 과거사를 조금씩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하려면 가장 큰 스포일러를 하나 터뜨려야 합니다. 예, 사고를 당한 버스엔 기정이 타고 있었고 사고로 한강바닥에 가라앉아 죽었어요. 사고 이후 준경의 핸드폰으로 날아오는 문자들은 적어도 드라마 설명에 따르면 통신사 서버 오류에 의해 예전에 저장된 문자들이 날아오는 거고요 (이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네요, 차라리 귀신이 그랬다고 보는 쪽이 더 그럴듯 하긴 합니다.) 실종자 명단을 매일매일 확인하며 준경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마지막 순간 자신의 실수를 곱씹으며 기준의 용서를 기다리는 거고요. 사랑과 영혼 같은 환타지 멜로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호평을 보내는 분들은 이런 지점에서의 공감을 느낀 분들일 겁니다.



하지만 모태 솔로의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자면 이건 러브스토리가 아닌 공포물입니다. 현대 핸드폰으로 부활한 '사자의 편지' 괴담이며 약속에 좀 늦었다고 헤어지자며 뻗대는 여친에 대한 원한으로 성불하지 못한 기정의 영혼이 준경에게 붙어서 괴롭히는 이야기입니다. (회의실에서 멍하니 있다가 뛰쳐나가질 않나, 미친년 마냥 한밤중 한강 다리 난간에 서있질 않나 것도 모잘라 헛개비 문자와 헛것에 시달리고 있잖습니까) 그런 점에서 세상 만사 해피해피 핑크빛이라며 닭살짓 하는 커플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며 남자친구 떠보겠다며 이별을 입에 올리는 여성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교훈극일...리는 없겠지요.

서버 오류로 잘못 발송된 메시지가 살아있는 기정이 보낸 것으로 착각한 준경이 예전 추억의 장소에서 그를 찾는 장면을 보세요. MOCCA의 사랑스런 보컬로 I remember를 흥얼거리는 브금 대신 섬찟한 음악만 깔아주면 공포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의 문자가 오고 문자를 따라 찾아간 장소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내용의 문자가 다시 날아오지만 발송자를 찾을 순 없다는 거잖아요!

기정은 참 속없는 남자입니다. 마지막 그가 준경을 애타게 데려가려 한 자신의 집에는 3주년 축하를 위한 딸기아이스크림이 촛불과 함께 녹고 있었다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거 좀 무리 아닌가요. 밖에서 약속 잡아놓고 상온에 아이스크림을 방치해 두다니...) 덕분에 준경은 죄책감에 시달릴 법도 하지만... 잘도 잊어버립니다. 기정이 마지막 남긴 짧은 음성 메시지는 (그리고 그의 사후 역시나 문자 마냥 잘못 발송된 메시지를) 그녀는 자기 편한대로 해석해버리고 아.. 그가 나를 위해 저승에서 보낸 메시지야라며 홀가분하게 털어버리는 거지요. 정말 기정의 영혼이 벌인 일이더라도 그런 생각으로 보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제가 모태솔로라서 일까요.

오프닝에 비춰주는 건 딸기 아이스크림이라기 보단 딸기를 얹은 아이스크림입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아이스크림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준경 역의 엄현경은 매력적이네요. 옆집소녀 같으면서도 뜯어보면 여신 분위기도 슬쩍 나는게 말입니다. 예전 시트콤에서 보여준 어설픈 연기에 비하면 내공도 훨씬 늘어난 듯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