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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reading 100 books

R.P.G - 미야베 미유키


R.P.G

미야베 미유키

(2011,40)


제목 RPG는 Role-Playing Game의 약어입니다. 게임 이용자가 게임상 캐릭터의 역할을 수행하며 진행되는 게임으로 게임의 목표나 목적이 역할 수행 자체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을 의미하죠. 역할 수행 게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서 이 용어는 두 가지 의미로 활용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서로 연결될 것 같지 않던 두 건의 살인사건에서부터입니다. 주택 신축 공사 현장에서 흉기에 난자 된 채 발견된 40대 가장과 목이 졸린 채 숨진 20대 여성. 별건으로 보이던 두 구의 시신은 남성이 일하는 제과회사의 홍보 이벤트에 숨진 여성이 고교시절 참가한 적이 있고 그 담당이 숨진 남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각각의 현장에서 동일한 증거 (한정 생산된 의류의 섬유)가 발견되며 동일사건으로 묶이게 됩니다.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고 숨진 여성에게 애인을 빼았긴 익명의 여성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용의자 스스로 경찰을 찾아와 결백을 주장하며 증거 역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수사는 난항을 겪습니다. 그런 가운데 피해자 남성이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과 가상의 가족 놀이를 하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수사본부는 유례가 없는 실험적 시도를 하게 됩니다.

RPG의 첫번째 의미는 피해자인 40대 가장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에서 했던 '가족놀이'입니다. 스스로를 '아버지'란 아이디로 칭하며 현실에서의 딸인 '가즈미'와 같은 닉을 쓰는 여성을 비롯한 4명의 익명인들과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연기하며 역할극을 하는 것이지요.

두번째는 경찰들이 진범을 밝히기 위해 시도한 탐문입니다. 이 책의 미스터리적 재미는 이 부분인데요 책속의 경찰이 범인을 속여 진술을 끌어내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서술트릭으로 작용하며 독자들까지 속이는 거지요. (스포일러) 그러니까 도코로다 료스케의 친딸 가즈미가 목격했다는 수상한 인물이 인터넷에서 만난 가상의 가족이자 용의자인 인물들과 동일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매직미러를 두고 벌어지는 취조가 사실은 역할극이었고 사건의 진범은 딸 가즈미와 그녀의 애인이란 진상입니다. 취조에 참여한 인물들은 사실 가족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참고한 경찰들이었고요.

현대 사회에서 해체되는 가족과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 웹상에서 위선적 가족을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고 즐기는 '놀이'에 심취하는 모습을 통해 웹이란 공간을 현실도피처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진범이 피해자의 그런 현실도피에 질려버리고 오해한 진짜 가족이란 점은 그런 현실의 불행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요.

어찌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역할극입니다. 학교에선 학생을 연기하고, 직장에선 근로자의 모습, 가정에선 부모나 자식을 연기하는 식이지요.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실제의 자신을 숨기고 연기해본 경험도 흔히들 있지 않습니까. 작가의 말처럼 작중에서 가해자인 진범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부모의 역할을 대행하는 듯 보이는 다케가미와 치카코 형사의 모습을 통해 도피처로 왜곡된 역할극의 극복은 현실을 인정하고 진심을 담은 또 다른 역할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실질적으로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취조 과정인 극의 전부이고요. 장편으로 보기엔 분량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좀 가벼운 편이고 극화로 치자면 단막극 같은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단편으로 보기엔 너무 크고요 정말 어중간한 분량이고 어중간한 내용이긴 해요. 중편 분량인데 이걸 한 권의 책으로 묶으니 좀 아쉬운 맛이 있습니다.

캐릭터들이 특이합니다. 다케가미와 치카코는 각각 작가의 전작인 <모방범>과 <크로스파이어>에 등장했던 형사들이거든요. 실지로 본작 중에도 크로스파이어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기도 하고요. 미야베 미유키 팬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