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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ncy's critic

[영화] 미쓰go

쓰GO


박철관


천수로는 심한 공황발작 증세로 혼자 생활이 힘든 사람입니다. 조금만 긴장하면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거죠.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장소, 상황에 처하는 것에 민감합니다. 그런 그녀의 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니 오랜동안 함께하며 그녀의 병으로 인한 어려움을 도와주던 메이트 영심이 일본유학을 떠나게 된 거죠. 이제 그녀는 홀로 자신의 병과 세상의 풍파에 맞설 생각에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그 순간 그녀 앞에 수녀복 차림의 여성이 나타나 수로를 도와주고 위로까지 해주며 작은 부탁을 하죠. 수녀란 신분 덕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이 된 그에게 생일 선물을 전해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수녀란 사람이 조금, 아니 많이 수상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연인이 있다던 호텔 방에 경찰시체가 너부러져 있고 수로는 부산 양대 조폭세력과 비리 경찰이 얽힌 사건에 휘말린 채 그들의 주요 타깃이 되어버립니다. 그놈의 수녀인 척 했던 해결사 녀성 때문이죠.


영화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런 식의 극구조를 일컫는 용어가 따로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나네요. 히치콕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서스펜스 극에 코미디를 가미한 건데요. 평범하다 못해 약간의 하자까지 있는 주인공이 어쩌다 커다란 사건에 휘말려서 이리저리 채이는 사이 결국 사건을 해결하고 만다는 거죠. 그런 고로 영화에서 주인공 천수로의 캐릭터는 매우 중요합니다. 극의 흥미를 담당하고 있는 거죠. 제법 영리하게 얽히고 섥힌 음모들이 있고 머리싸움들이 등장하는 가운데에도 이야기의 중심을 잡는 건 천수로 캐릭터 입니다. 자연스레 수로를 연기한 고현정의 이미지가 중요해요. 그녀는 이 빠른 76년 공황장애 환자 순정만화가를 매우 그럴듯하게 연기해냅니다. 그 동안의 연기 경력이 허울은 아님을 제대로 증명해주죠. 중후반부 까지의 공황장애로 중요한 순간마다 헤매는 세상물정 모르는 수로의 모습은 그녀가 컴백 후 보여줬던 철없는 노처녀 캐릭터와 비슷합니다. 극중 '만'으로 36살인 노처녀 캐릭터임에도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외모에 하는 짓도 종종 애기 같죠. 그러니까 애기같은 사고수준이란 게 아니라 어렵거나 난감한 상황에 입을 삐죽이 내밀거나 겁에 질려서 말똥말똥 거리고 상황이 해결되면 언제 그렇냐는 듯 헤죽 거리는 거 말입니다. (사실 고현정 본인은 극중 수로보다 다시 5살이 더 많음에도 세월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더군요. 확실히 이 사람 절대동안이긴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수로가 큰 고비를 넘기고 캐릭터가 150도 정도 틀어지는 후반부에선 그녀의 연기력이 폭발합니다. 수 천권의 책에서 얻은 간접 경험으로 범죄자들을 들었다 놓으며 농락하는 수로를 연기하면서도 고현정은 미실을 연기할 때와 같은 카리스마를 뿜는 대신에 여전히 찌질하고 소심한 수로가 안간힘을 쓰며 상황에 적응하는 모습을 깨나 그럴듯하게 연기합니다. 덕분에 캐릭터 자체의 매력지수도 올라가거니와 이야기의 결도 풍성해집니다.


고현정 얘기만 길게 늘어놓았는데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는 고현정이 연기한 천수로의 1인극입니다. 그외 남자 캐릭터들은 상황을 만들며 그녀를 '거들 뿐'이죠. 하지만 저마다 한 연기 한다는 소위 '대한민국 명품 조연'들이 싸그리 등장한 덕에 수로가 나오지 않는 부분들도 꽉 들어찬 느낌입니다. 고독한 하이에나 같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한 남자 '빨간구두'를 연기한 유해진 부터, 성동일, 고창석, 이문식, 박신양에 김병철, 이원종, 남성진까지 배우들 이름만 나열하는데도 진이 빠질 수준입니다. 이 정도면 이들이 선방이 아니라 기본만 해줘도 극은 풍부해 질 수 밖에 없죠. 거기다가 좋은 이야기와 각자에 개성있는 캐릭터들까지 가지고 있다니까요.


이야기의 짜임새가 괜찮습니다. 음모에 음모가 계속 겹쳐지고 인물들 관계가 수시로 바뀌는데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할 이야기를 다 쏟아놓고 있어요. 물론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좀 허술한 구석도 있고. 헐리웃 영화에서 익숙한 설정들을 현지화 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같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습니까? 검색을 해보니 원작인 (게임오버-수로 바이러스)는 오래전에 책으로 출간된 소설인 모양이더군요. 원작 소설에 대한 내용 정보들을 보면 영화와는 매우 다른 구성인 모양새의 실험적 소설인 모양인데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 집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6100


극중 천수로의 직업은 만화가입니다. 사실 만화가란 직업이 골방에서 자기 몸 망가뜨리며 씨름하는 캐릭터가 강하니만큼 공황장애란 수로의 병명과도 깨나 어울리긴 합니다. 그와 별개로 극중 수로가 그린 것으로 되어있는 만화그림들이 완전히 제 취향이더군요. '아.. 저렇게 그릴 수 있으면 좋겠어'라는 딱 그 그림체. 영화 엔딩 후에 조금만 기다리면 만화 컷으로 구성된 짧막한 후일담이 나오기도 하니까 놓치지 마시길.


여름시즌 큰 영화들 사이에 개봉하느라 홍보 단계에서부터 고전하는 느낌인데 좋은 작품인 만큼 제대로 평가받고 많은 관객에게 선보였으면 좋겠네요. 영리한 한국식 코믹 서스펜스를 즐기고 싶으신 분에겐 후회없는 선택이 될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