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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reading 100 books

더 박스 - 리처드 매드슨

더 박스

리처드 매드슨

(2011,23)


'나는 전설이다'의 작가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집

1. 버튼, 버튼 : 이상한 장치

환상특급과 영화로 접한 익숙한 이야기다.

작은 버튼을 누르면 지구상 어디간에서 사람이 죽는다. 당신이 잘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며 버튼을 누른 보상으로 5만달러를 받게 된다. 당신은 버튼을 누를 것인가?

흥미로운 설정은 철학적 고민을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고 윤리적 은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단지 버튼을 누르는 행위'만으로 대량 살상이 가능해졌으니까. 일례로 최근의 프레데터 같은 무인 정찰기의 조종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과 비슷한 딜레마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화면으로 보는 영상은 실재인가, 아니면 훈련용 시뮬레이션인가. 아니면 흐릿하게 보이는 건물엔 대량살상무기가 있는가 민간인이 대피해 있는 단순한 방공호는 아닌가?)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화두에 비해 결말은 좀 심심하다.

2.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

예지몽을 꾸는 여자와 그것을 이용하려는 남자(남편)의 이야기다. 처음 정보를 제한적으로 제공하며 대체 여자가 꾸는 꿈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솜씨가 빼어나다. 하지만 그 뒤의 흐름은 별다를게 없다. 결말의 반전 역시 지금 시대에 보자면 좀 빤해 보이는 건 많은 미디어에서 비슷한 장치들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매춘부 세상

반전의 재미가 톡톡한 결말은 아마 이 글이 써질 무렵에는 꽤나 전복적인 구석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제목처럼 매춘을 다루긴 하지만 도덕적 법제적 고민이 있는 건 아니다.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성매매여성은 그자체이기 보다는 어느 날 집앞에 툭 떨어진 도덕적 타락을 상징한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세상에 만연한다면, 시스템이 제제하지 않는다면, 남들이 다 하고 있다면 우리의 의지도 쉽게 흔들린다는 것을 은유한다. 물론 그 결말은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이고.

4. 흡혈귀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역시나 마지막 반전을 노린 글이다. 흡혈귀에 대한 기존의 공식/상식들을 이용해 한껏 분위기를 이끌고 가다가 막판에 상황을 뒤집는다. 깜짝쇼로서의 기능은 훌륭하지만 '나는 전설이다' 같은 작품을 쓴 작가의 글로 보기엔 지나치게 소품이다. 그래도 재미는 있다.

5. 옷이 사람을 만든다

역시나 깜찍한 반전이 있는 단편. 유난히 옷차림에 집착하는 형님에 대해 이야기하던 남자는 자신이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누군인지 아는 순간 아연실색한다.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곤 단순히 몸을 가리고 몸을 따숩게 하는 목적에 충실한 의복은 현대사회에선 각각이 아이콘적 성격을 지니며 옷을 입은 사람을 상징하게 되었다. 비단 옷차림만이 아니다. 그가 차고 있는 액세서리, 헤어스타일, 말씨, 휴대폰, 자동차, 집, 직장 심지어 애인까지. 보여지는 모습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꼬고 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위해서 죽어라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어느날 내가 입은 옷이, 또는 인터넷 상의 정체성이 본래의 나를 압도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6. 카페에서 생긴 일

베이컨시나 휴게소(rest stop)같은 영화가 떠오른다. 특히 휴게소의 경우 이 소설이 원작이거나 많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적한 도로변 카페에서 남편이 사라지고 자신들의 차마저 사라지는 묘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은 위험을 직감한다. 카페 사람들의 말처럼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것인가, 아니면 이들이 모두 작당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인가? 환상적 요소들이 다분한 다른 단편보다 현실적인 공포를 다루고 있다.

7. 충격파

SF적 요소를 가미된 호러. 교회 오르간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해오던 오르간이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동료는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며 실질적 현상들도 과학으로 해명 가능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예배가 진행될수록 오르간은 점점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결말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이 될 수 있다. 정말 초자연적 현상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8. 벙어리 소년

수록작 중 가장 분량이 긴 글이다. 화재현장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소년과 그 소년을 거두어 기루며 아이의 다름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다가 의외의 결말로 흐른다.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현실적인 것인지를 미루더라도 마을 사람들의 상반된 반응은 흥미롭다. 다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틀리다고 착각하는가는 개인의 자유다. 그런 선택이 대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다. 작가 스스로도 그들의 선택이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문제임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단순히 다르다고 틀리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결말이 준비된 것도 아이가 자신의 다름을 그대로 받아들여준 사람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9. 특이한 생존방식

글의 구조를 통한 재미를 보여주는 엽편이다. 다중이 놀이도 이쯤이면 심각하다.

10. 소름끼치는 공포 : 석사학위 논문에서

논문이라기 보다는 기사를 보는 듯한 구성이다. (서본결도 없는 구성도 그렇거니와 논문이라기엔 각주들이 너무 빈약하다) 80년대 블록버스터의 등장과 함께 헐리웃 영화산업이 다시 활황하며 LA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등장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해본다. 이 글은 그런 LA의 요지경을 경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포요, 비버리 힐즈 사람들 입장에선 천국의 도래를 보는 듯 할 것이다. 수록된 작품 중에 가장 웃긴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른 바 '로스엔젤레스 운동'이라는 현상을 통해 헐리웃과 비버리 힐스 문화가 말 그대로 바이러스가 되어 미 전역에 퍼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뭔가 미지의 것이 서서히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며 기존 질서를 전복시키는 광경은 공포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인데 (좀비, 외계인, 흡혈귀 등등) 그 대상이 감귤류나 핫팬츠 차림으로 테니스 치는 아저씨, 헐리웃 상업영화와 그 영화의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소녀떼가 되버리니 곧 코미디가 된다. 반대로 저항하는 입장은 되레 무서운 존재처럼 보인다.

'자신의 차고에서 깡통 따개로 롤스로이스 차량의 덮개를 열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사살된 애프너 스크라운지 씨의 병자성사가 오늘 거행되었다.' (본문 중의 신문기사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