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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reading 100 books

삼악도 - 김종일


 

삼악도

 

김종일

(2011,30)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소설가에게 어느 날 매력적인 제안이 들어옵니다. 작업중인 영화 각본을 완성시키는 작업에 참여하는 대가로 천만원을 주겠다는 거지요. 한 가지 조건이라면 각본의 원안자이자 감독인 남자에게 '전적으로' 협조할 것입니다. 그리하야 감독과 작가 또 한명의 스탭 세 명의 남녀는 정해진 기간 안에 작품을 끝내기 위해 어느 외딴 섬으로 향합니다. 삼악도란 이름의 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기괴한 용모 만큼이나 해괴한 행동을 일삼는 노인인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행동하다가도 감독 앞에선 벌벌 기며 집사노릇을 충실히 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처음엔 MT라도 가는 기분으로 시작한 섬여행은 갈수록 꼬여만 가고 시나리오 집필과 관련해 감독과의 갈등이 커져가는 사이 주인공인 여자작가 오현정은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거나 헛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김종일 작가의 삼악도 기둥 줄거리는 뻔합니다. 이미 여러 창작물들에서 갖가지 변형을 거쳐 우려먹은 설정들이지요. 궁지에 몰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하는 작가라던가, 무인도나 다름 없는 섬이란 폐쇄된 공간에서 접하는 심령현상,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밝혀지는 주위 사람들의 비밀...

쟝르에 익숙한 독자라면 몇몇 소설이나 영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자들에게 익숙한 설정들을 사용하는 작가의 태도는 두가지일 겁니다. 창작욕도 없고 뭔가는 만들어야 하니 기존의 것들을 짜집기해서 대충 표절만 피해보자는 심산. 아니면 기존의 식상한 틀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보자는 시도.

이전 작품들을 통해 김종일 작가는 자신이 쟝르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동시에 부지런한 창작자란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장편인 만큼 다행히도 '삼악도'의 태도는 후자에 속합니다.

삼악도의 제한요소는 비단 익숙한 설정만이 아닙니다. 책의 80% 이상은 삼악도란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주가되는 등장인물도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네 명이지요) 게다가 주인공인 오현정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문장은 후반으로 갈수록 심해지는 그녀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더욱 제한됩니다. 이렇게 문학적 페소공포를 느낄만한 설정들을 작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파해합니다. 물리적 공간이 제한되면 인물의 심리를 파고들거나 회상을 집어넣고, 동일한 인물들 간의 대화가 이어져 대사가 뻔하게 흘러간다 싶으면 갖가지 인용들을 적절히 끌어와 컨테츠를 풍부하게 만들지요. 장담컨데 쟝르에 대한 기본적 이해만 있다면 적어도 '재미없어서' 이 책을 읽다가 내던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뻔한 설정을 영리한 구성으로 일신하는 사이 수많은 인용과 참조문들이 나옵니다. 영화 감독과 공포소설가라는 인물관계와 영화시나리오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란 기본설정 때문에 영화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직접적인 대사나 장면의 연상,인용이라던가 영화의 트리비아에 관한 언급 등 내용이나 방식은 다양합니다. 저처럼 어중간한 영화마니아나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체 이게 뭔 소리?'란 생각이 들거나 문장마다 일일히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야할 정도로 마니악한 부분들도 꽤 되는데 그런 부분을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독자들이라면 책을 즐기는데 + 요인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후자의 독자들이라면 오히려 재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겠다 싶은 부분들입니다. 하긴 보통은 전체적 흐름에 영향 없으면 흰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 생각하며 넘기겠지만 말입니다.

결말에 대해선 호불호가 나뉠 것 같습니다. 감독에 관한 설정들이 밝혀지는 부분이라던지 거기에서 이어져 하나의 시나리오를 탈고하는 과정을 산고의 고통에 비유하는 부분 같은 경우 개인적으로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책 중반까지 나름 현실과 악몽을 줄다리기하던 이야기가 완전히 한쪽으로 치우쳐버리기 때문에 '너무 나갔다'라고 생각하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독자들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앞서 말했듯 작가가 '뻔한' 설정에서 시작한 글을 뚝심있게 밀어붙여 새로운 결말로 자연스레 마무리했다는 겁니다. 어떤 형태로든 평가받아야 마땅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이야기 흐름에 공감하기만 한다면 책의 후반은 흔한 표현으로 '악몽 그 자체'이기 때문에 공포란 쟝르적 재미의 순도가 굉장히 높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만 하고요.

마지막 엔딩은 개인적으로 조금 불만입니다. 삼악도에서 탈출하는 부분까지 새로운 것을 보여줬건만 에필로그 형식의 마무리는 너무 전형적이었거든요. 작가의 말을 통해 언급된 작품 의도와 맞아떨어지는 수미상관식 구성이긴 하지만 말이죠.

책에 대한 최종 평가는 작중에서도 언급된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 문구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모두가 피의 책이다. 어디를 펼치든 모두 붉다."